[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여자들처럼 말 곧 언어를 안주로 해서 몇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남자’라는 종족들은 자나 깨나 술을 마시기만 하면서 술잔에 대해서는 그리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옛날 중국 사람들은, 이 술잔에 대해서도 애착이 있고 집착이 많았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기왕에 먹는 술, 뭔가 색다르고 정취가 있고 멋있게 먹느냐를 궁리하다 보니, 술잔에 멋이 있어야 한다는 데로 생각이 미친 것이리라.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한학자인 아오키 마사루(靑木正兒, 1887~1964)는 중국의 문화를 연구해서 펴낸 책 《중화명물고(中華名物考)》의 ‘주상취담(酒觴趣談)’이란 항목에서 술잔의 등급을 매겨 발표한다. 으뜸으로 치는 것은 ‘야광배(夜光杯)’다. 전설에 따르면 주(周)나라 5대 목왕(穆王)이 순시하기 위해 서역에 왔을 때 서역 사람들은 백옥의 정(百玉之精)으로 만든 술잔을 그에게 바쳤다. 달은 밝고 바람이 맑은 밤에 술이 잔 속으로 들어가자 술잔은 선명한 광채를 발하면서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주나라 목왕은 크게 기뻐하여 이를 나라의 보배로 여기고 “야광상만배(夜光常滿杯; 밤에 광채가 항상 잔에 가득하다)”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맑은 시내가 흐르고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 그곳에 고래등 같이 우뚝 솟은 기와집을 짓는다. 마루는 시원하고 방은 따뜻하며 둘레에 난간이 처져 있고, 창과 출입문은 밝고 깨끗하며 방바닥에는 왕골자리가 시원하게 깔린다. 흐르는 물이 당 아래에 감아 돌고 기암괴석이 처마 끝자락에 우뚝 솟아 있으며, 맑은 못이 고요하고 시원하며 해묵은 버드나무가 무성하다. 이리하여 무더운 여름 한낮에도 이곳의 바람은 시원하다." - 김창협. 청청각기(淸淸閣記)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 이런 집을 짓고 무더운 여름에도 시원하게 살고 싶은 것이 보통의 바람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문인들이 이런 좋은 환경에 집을 마련하고 살았을 것이지만 그들의 그윽한 경지를 눈으로 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또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벼슬을 한다고 해도 여간해서는 나라에서 주는 녹봉만으로 이런 집을 지을 재력을 갖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집안에 재력이 있는 경우임이 틀림없다. 조선시대의 문장가로 유명한 농암 김창협(1651,효종 2∼1708,숙종 34)은 아버지 김수항이 기사환국(숙종 15년인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지치고 힘들 때 어제 아침이 바로 그랬다. 가을 하늘보다도 더 높은 하늘. 구름은 어디 갔는가? 하늘의 끝은 어디이고 바다의 끝은 어디인가? 그 망망한 경지를 보노라면 눈을 뜨기 힘든 것인가? 김동규가 부른 그 노래의 첫머리 그대로이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노르웨이 출신의 음악가 secret garden이 바이올린 곡으로 연주한 것을 번안했지만 요즈음에는 마치 아주 오래된 우리 가곡처럼 느껴지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는 원곡의 제목이 ‘serenade to spring', 곧 봄에 바치는 세레나데다. 이것을 10월이라는 달에 갖다 붙인 것인 만큼, 최근 몇 년간 계절이 빨라지고 있어 꼭 10월에만 들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면, ’9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고 가사를 살짝 바꾸어서 그리 죄가 될 성싶지 않다. 그것은 왜냐하면 하늘이 걷히고 가장 눈에 좋다는 파랑(blue)이 온 시야를 가득 채우는 이런 때에는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라고 한 것처럼 사랑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거대한 강이나 망망대해의 엄청난 물도 하늘에서 내리는 작은 물방울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지난 장마 기간에 벌어진 '일만 척 폭포 소동'도 발단은 집 근처의 폭포줄기에서 시작되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는 폭포동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원래 진관동인데 웬 폭포동이람? 무슨 이런 이름이 끼어들어 있지? 하면서 이사 온 것이 지난 4월 초. 이달 초 사상 가장 긴 장마에다가 폭우가 쏟아지는 날 마침내 그 비밀을 풀었다. 우리 동네의 폭포동(瀑布洞)이란 이름은 행정구역상의 동(洞)이 아니고 폭포가 흐르는 골짜기라는 뜻임을. 아무튼, 북한산 향로봉에서 구파발쪽으로 내려 이어지는 바위 사이가 조금 파여있다 싶더니 그 사이로 허연 폭포 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정말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 같았다. 그 폭포 물줄기는 왼쪽으로 해서 골을 타고 내려오는데,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다가 비가 많이 오면 이런 폭포가 생긴단다. 너무 신이 나서 사진을 찍어 카톡을 통해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며 갑자기 폭포가 생겼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랬더니 속초에 사는 한 교수님이 이런 사진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앗! 우리나라에도 이런 폭포가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 후기 숙종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장희빈으로 인한 것이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소의(昭儀) 장 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 아들을 원자로 삼고 소의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는데, 이에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서인(西人) 세력이 이를 극력 반대하자 숙종이 당시 정권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유배 보내 사사(賜死)케 하였다. 이로 인해 정치의 중심은 서인(西人) 세력에서 남인(南人) 세력으로 일시 이동하였는데,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한다. 숙종 15년, 1689년의 일이다. 이 기사환국에서 당대의 거유(巨儒) 송시열이 몰락한 것과 동시에 그를 떠받치던 서인 김수흥(金壽興1626~1690)ㆍ김수항(金壽恒1629 – 1689) 형제가 파직, 유배를 당해 사사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당시 대사성을 지내는 등 일찍 관계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이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수항이 사사(賜死)된 뒤에는 일체 관직을 사양하고 시골에 은거하면서 문학과 유학에 정진해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도 이름을 날렸다. 그러한 김창협이 30살 때인 1681년(숙종 7년)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에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영국의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프리스틀리(J B Priestley 1894-1984)는 젊을 때 게으른 화가 친구와 함께 시골 오두막을 찾은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친구와 함께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가장 가까운 늪지를 따라 해발 600여 미터의 구릉까지 빈들거리며 올라간다. 거기서 풀밭에 큰 대자로 드러누운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해를 다 보낸다. 그러고는 해가 지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다. 그들에게 황야는 근사한 휴게실이었다. 고개를 들면 눈 앞에는 끝이 없는 푸른 하늘이 장막처럼 쳐져 있었다. 그것은 실내장식이 되어있지 않은, 천국으로 통하는 대기실이었다고 그들은 표현한다.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끝없는 단조로움만이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깜빡이는 흥미를 하루종일 지루하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붉은 노을 속에서 천천히 변해 가는 구름과 그림자의 무늬 같은, 미묘한 다양성, 그리고 그 구름이 지니고 있는 고요함과 영속성, 인간과 인간의 관심사에 대한 고래로부터의 초연함, 그런 것에서 그들은 마음을 쉬고 마음의 정화를 느꼈다고 한다. 그런 휴식을 그들은 하고 싶은 대로 했다. 황야에 드러누운 채 하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길게 느껴졌던 올 한해도 절반 이상이 달아났다. 예전 같으면 끝났을 장마는 남부에서 중부로 올라오면서 여전히 많은 비가 내리는 속에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고 일단 장마를 피한 남부지방은 불볕 무더위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무더위도 곧 입추에다 말복을 지나면 꺾일 것이다. 그래도 덥기는 덥고 그 더위를 피하는 일이 또 이 여름의 주요한 숙제다. 그런데 이 더운 여름철 내내 방문을 꼭꼭 닫은 채 옷을 차려입고 책상을 앞에서 꼿꼿하게 앉아 공부하는 분이 477년 전 조선시대 중기에 있었다. “선생이 일찍이 서울에서 《주자대전》을 구해오셨는데, 문을 닫고 들어앉아 읽기 시작하시더니 여름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으셨다. 주변에서 더위에 몸을 상할 수 있다고 걱정을 하면 선생은 말씀하시길 ‘이 책을 읽으면 문득 가슴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어나서 저절로 더위를 잊어버리는데, 무슨 병이 나겠는가?’ 하셨다.” 선생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이 기록한 선생의 언행록에 나오는 장면이다. 이 선생이 누구신가? 바로 우리나라 주자학의 큰 봉우리인 퇴계 이황(1501~1570)이다, 선생이 한여름 무더위도 느끼지 못한 채 열심히 읽은 책은 《주자대전(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장마 속에 소나기와 무더위가 번갈아 찾아오는 계절이 되니 다들 더위를 어떻게 이길까를 고민하는 것 같다. “그거 뭐 걱정인가요. 에어컨 켜고 그 속에 있으면 되지요.”라고 말하면 가장 첨단을 사는 사람일까. 그러나 에어컨 병으로 인생 말년의 몸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전기 에너지보다는 자연 에너지가 더 이롭다고 할 것이다. 힘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자연 피서법은 없을까. 그런 고민이야 현대인들보다는 전기적 피서법이 없던 옛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퇴계 이황은 여름 한 철을 꼬박 문을 닫고 의관을 갖춘 채 방 안에 앉아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읽었는데, 사람들이 무더위에 건강을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자 퇴계가 말하기를, “이 책을 읽으면 가슴속에 절로 시원한 기운이 일어난다.”라고 답했다 한다. 그런 경지야 우리로서는 맨발로 뛰어도 따라가지 못할 경지일 터다. 필자는 다행히 북한산 옆에 집을 얻어 살고 있어서 가능한 한 골짜기로 들어가서 시원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맑은 바람을 쐬는 것으로 더위를 피한다. 그러나 도시 한가운데에 사는 일반인들은 이런 방법을 쓰려면 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지칠 것이다. 평생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사람이 살다가 계절이 순환하는 것을 보면 가끔 무섭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 올린 글을 다시 상기시키며 그걸 재 공지할 것을 물어보는 페이스북에 보니 3년 전 딱 요때에 비가 많이 내려 그 비를 맞으러 밖으로 뛰어나가 찍은 사진들이 다시 올라온다. 남쪽엔 비가 많이 왔지만 서울 근처에는 비가 많지 않아 사실상 북한산 일대는 가뭄 증세가 있었는데 어제 밤과 오늘 사이에 쏟아져 내린 100밀리 가량의 비로 땅 속 깊이까지 빗물이 배어 아마도 식물뿐 아니라 동물들도 좋아하고 있는 듯하다. 딱 3년 전의 일이다. 지금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그냥 내리는 것이 아니라 줄줄 내린다. 하염없이 내린다. 아파트 거실의 문을 닫고 비를 바라본다. 빗방울들이 창문을 때리고 있다.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들이 조르르 미끄러지는 것을 보는 것은 재미있다. 바람이 조금 부니 빗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비를 보고 있는가?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는가? 비는 보는 것인가? 듣는 것인가? 조선조 중기의 시인 장유(張維,1587~1638)는 내리는 비를 보면서 잔뜩 흥취가 나는 것을 표현하면서도 시의 제목은 청우(聽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우리가 사는 동네의 중심이라고 할 연신내 네거리에 가면 마트가 있다. 마침 집안 정리에 필요한 작은 물품들이 필요한 아내를 따라서 마트에 갔다가 2층에 있는 시계가게를 보게 되었다. 시간이 일러서인지 주인은 나오지 않고 크고 작은 각종 시계가 수없이 걸려 있다. 모양은 대개가 둥근 것이지만 크기가 큰 것에서 작은 것까지, 색깔도 다양하다. 그런데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시계들이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거의 없다는 거다. 12시를 가리키는 것들이 좀 있지만 대개는 저마다 긴 바늘, 작은 바늘 모두 제 멋대로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서는 시간이 서로 다른 게 아닌가? 이 시계들은 두 가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같다. 모든 시계들이 일정한 시간을 지키며 가야하겠지만 실제로는 각자의 시간대로 가는 것이구나 하는 점이 첫째이고 또 시계의 크기에 따라서 시간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같은 시계의 운명을 타고 났지만 시간이 맞추어지는 시점에 따라 각자 시작을 달리하고, 시계에 따라서 아무리 정확하게 시간이 가도록 해 놓았다고 하지만 저마다 점점 차이가 벌어져 다른 시간을 가리키게 된